“살아선 王의 형, 죽어선 佛者의 형”… 세종과는 다른 양녕의 허위의식
양녕대군만큼 역사에 자주 등장하면서도 베일에 싸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실록과 야사(野史)에, 그리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양녕은 종종 독특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권력에 초탈하고 사회적 평판 따윈 팽개친 채 ‘마이 웨이’를 걸어간 잘생긴 호남아(好男兒) 이미지가 그것이다.
실록에서 그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왕세자로 책봉된 1404년(태종4)이다. ‘종묘 제사를 위해 적장자(嫡長子)인 그를 세자로 삼았지만, 예의와 겸양을 모르고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익히지 못했다’는 부왕의 우려 섞인 말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1462년(세조8)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흥미롭게도 그는 항상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등장한다.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면서도 오히려 기뻐했다든가, 부왕 태종에게 병 든 매를 선물해 골탕 먹였다든가,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든지 하는 말들이 전해져 기록되었다.
양녕이 역사의 객체로만 등장하는 데는 그 자신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1418년까지 무려 14년가량 대권 후계자로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정치적인 행동이나 숙려 깊은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외삼촌들의 정치적 이용가치로, 부모의 한숨을 자아내는 철부지로 인식되고 기록되었다. 동생 세종이 그 대신 왕위에 오르면서 신하들은 그를 더욱 확실하게 대상화했다. 나랏법을 무시하면서도 왕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하는 ‘시대의 골칫거리’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양녕의 정치적 침묵이나 초법적 행위는 그만의 생존법일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비운의 인물 사도세자와 달리 그가 온전히 제 수명(69세)을 누릴 있었던 것은 정치권력으로부터 거리 두기와 독특한 유체이탈 화법에 힘입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생존법에 너무 오래 익숙해지다 보니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점이었다.
1446년(세종28) 회암사에서의 일이다. 당시 효령대군이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양녕이 그 절에 찾아와 들에서 사냥한 새와 짐승을 가져와 구우려 했다. 참다못한 효령이 ‘절에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나무라자 양녕은 “만일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오뉴월인데도 자네의 귀마개를 왜 벗기지 못하는가”라고 비꼬았다.
동생의 신체적 약점을 들어 자신의 매너 없는 행동을 덮으려는 양녕의 지질함에 쓴웃음을 짓게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양녕의 그다음 얘기다.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 또한 불자(佛者)의 형이 되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즐겁지 아니한가.”
우스갯소리로 종종 회자되는 이 말은 그의 허위의식을 잘 보여준다. 양녕은 동생 세종처럼 민생을 보살피고 외침을 막으려 노력한 사람이 아니다. 효령처럼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자기 수련의 길을 걷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부귀를 누릴 자격이 있고 나중에는 부처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양녕의 언행을 읽다 보면 루쉰(魯迅)의 ‘아큐’가 떠오른다. 마을에서 가장 무력하고 비겁한 아큐는 남에게 모욕당하고 실컷 얻어터진 후 마음속으로 자기가 오히려 그를 때렸다고 생각을 바꾼다. 자기 안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정신승리법’의 소유자, 혁명세력인 양 사람들을 속이려다 끝내 개죽음으로 생을 마치는 아큐야말로 허위의식의 끝판왕이다.
우리 주위에는 너무 많은 ‘양녕’과 ‘아큐’가 있다. 자기 실력을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는 자, 학벌 자랑하고 직장 간판 내세우는 데 급급한 자는 현대판 ‘왕의 형’이다. 남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어쭙잖은 댓글을 달면서 스스로 유식한 체하는 이, 자기 안의 온갖 더러운 것을 닦아낼 생각은 안 하면서 남의 허물만 들쑤시는 자는 모두 ‘불자의 형’들이 아닐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328010326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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