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군6진 반대 들끓어도…김종서 믿고 맡긴 후 기다려 주니 영토확장 大業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1444년 1월, 흉년을 이유로 축성(築城) 중지를 요구하는 언관에게 세종이 타이르면서 한 말이다. 4년 전부터 세종 정부는 병조판서 황보인의 제안, 즉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성을 쌓아 적의 공격을 차단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그 일을 총감독하게 하고 있었다.
세종의 “사람 쓰는 원칙(任人之道)”은 한마디로 열심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 성과를 거둘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북방 영토 개척을 역설하는 김종서에게 그 일을 맡겨 7년 동안 책임지게 한 것이 좋은 예다. 세종은 그 기간 동안 충남 공주의 김종서 어머니를 직접 챙기는가 하면, 각종 모함으로부터 그를 시종 보호하였다.
하지만 큰일일수록 반대하는 자도 많다. 1437년에 함경도 사민(徙民) 정책에 대해, 이주 명단에 오른 백성은 자살까지 하면서 저항했다. 설상가상으로 여진족의 경원읍성 포위 사건까지 터지는 등 내우외환의 조짐이 보이자 대다수 조정 신료는 새로 개척한 진(鎭)의 철수를 주장했다.
세종은 현지 책임자인 김종서에게 편지를 썼다. 1831자의 한자(원고지 28장의 번역문)로 된 장문 편지의 요지는 “큰일을 이루려 할 때 처음에는 비록 순조롭지 못한 일이 따르지만, 후일 그 공효(後日之效)는 틀림없이 창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김종서 역시 답장을 보냈다. “어찰(御札)을 뵈옵고, 여러 날 동안 낮이면 읽고 밤이면 생각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백성 사랑하시기를 지극히 하시고, 나라 걱정하시기를 장원(長遠)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깊이 공감”했다는 말로 시작되는 김종서의 편지 역시 만만치 않게 길다(한자로 2617자, 원고지 44장의 번역문).
그는 답장에서 “빨리 이루는 것을 구하지 마시고(不求速成),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며(不貴小利), 작은 폐단을 계산하지 마시라(不計小弊)”고 조언했다. 그러면 마침내 “뜬 말(浮言)이 스스로 가라앉고 민심도 저절로 안정될 것”이라는 게 김종서의 판단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세종은 즉시 회답했다. “내가 북방의 일에 대해 밤낮으로 염려했는데, 이제 경의 글월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서울에서 경원까지 876㎞(2190리)를 뛰어넘어 오가는 편지들을 읽다 보면 물리적 거리는 결코 소통의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 원활한 소통의 결과, 함경도 지역이 우리 땅이 됐고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가 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 사실에서 신뢰 어린 인재 경영의 힘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안들, 즉 헌법 개정이며, 통일 문제 등은 하나같이 국가의 장원(長遠)한 일들이다. 그렇다 보니 안팎으로부터 어려움이 겹쳐 나온다.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악의적으로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도 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빨리 이루려는 조바심이다. 사사로운 이익이나 작은 폐단에 얽매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보다는 세종이 했던 것처럼, 일 맡은 인재를 끝까지 보호하면서 그로 하여금 오로지 후일의 공효를 극대화하는 데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역사의 큰 업적으로 꼽히는 한글 창제나 4군6진 개척, 그리고 정조 시대의 수원 화성 건설 등의 뒤에는 항상 인재에게 일을 맡기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지도자가 있었음을 기억해야겠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321010328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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