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회례연에서 조선 고유의 雅樂을 연주한 까닭은…
세종에게 가장 뜻깊은 설날은 언제였을까? 1419년 1월 1일(음력), 즉 왕위에 오른 지 첫 번째 맞는 원단(元旦)의 주인공은 상왕인 태종이었다. 이른 아침 세종은 면류관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 쪽에 예를 올린 다음,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여러 신하의 세배를 받았다. 새해 인사에는 승도(僧徒)들과 일본 사신(倭人), 그리고 아랍 사신(回回)들도 참여하였다.
이어서 그는 부왕 내외가 있는 수강궁(지금의 창경궁 자리)으로 이동해 여러 신하와 세배를 드렸다. 새해 선물로는 의복과 안장 갖춘 말(鞍馬)을 준비했는데, 세종이 부왕께 장수하시라는 수주(壽酒)를 먼저 올렸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태종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종친과 여러 신하도 어울려 춤을 추면서 시구 잇기(聯句)를 즐겼다. 이날 태종이 덕담으로 준 말은 공경과 삼감(敬愼)이었다. “하늘은 백성의 눈을 통해 우리를 살펴보는 것이니(天視自民) 마땅히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새해 첫 행사로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나, 일본과 아랍 지역 사신의 새해 인사를 받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왕인 태종에게 올리는 설 선물 목록과 오래오래 사시라고 술을 올리는 장면, 군신이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고, 여러 신하가 경쟁하듯 시구를 이어 바치는 풍류 넘치는 모습이 낯설기까지 하다.
세종이 설날 행사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이 된 것은 태종 사망 이후인 1422년 원단이었다. 하지만 이날 중국 쪽에 대한 예를 올리고 일본 사신의 예물 받는 일 외의 행사가 일체 정지되었다. 태종의 국상 정국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에게 가장 뜻깊은 설날은 재위 15년째인 1433년 새해 첫날이라 할 수 있다. 이날도 세종은 이른 아침 중국 황제에 대한 예를 올렸다. 근정전에 나아가서 왕세자의 절을 받고 여러 신하, 일본 등 외국 사신들의 새해 인사를 받는 것도 비슷했다. 한 가지 큰 차이라면 이날 처음으로 회례연(會禮宴)에서 아악(雅樂)을 사용한 점이다.
아악은 국가의 공식 행사용 음악으로 이즈음 세종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나라와의 문명경쟁 차원이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서 보듯이, 세종은 유교 문명의 상징인 아악 분야에서 명나라나 일본, 야인보다 우리가 앞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1425년부터 1432년까지 8년에 걸친 아악 프로젝트는 바로 그러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아악을 회례연, 즉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인 근정전의 조회에서 연주하는 것은 국내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고려 때 관직에 진출한 구세대와 조선 건국 이후 과거에 합격한 신세대 간의 갈등, 수차례 왕자의 난으로 소외된 세력들의 불만, 그리고 일본과 여진 지역으로부터 집단으로 귀화해온 많은 이민족을 ‘조선사람’으로 포용하는 문제 등을 녹여내는 계기가 필요했는데, 회례연 아악 연주는 그 상징 장치였다.
1433년 설날 회례연의 아악 연주 자체도 훌륭했다고 한다. 근정전 단상 위(당상)의 편종과 편경 사이에서 노래하는 이나, 단상 아래의 취각인 및 악기 연주자들이 정제된 화려함 속에서 각각의 소리를 완벽히 연주했다. 기록을 보면 이날 “축과 어를 치고 금슬을 연주하며 노래를 하니, 돌아가신 조상의 신령이 나타나 감격하고, 여러 부처의 책임자들이 서로 겸양하여 화목하였으며, 군신 상하가 모두 화해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고 한다.
600여 년 전 설날 이야기를 세세히 말하는 이유는, 부디 이번 설날 연휴만이라도 가시 돋친 설전을 중단하고 서로 겸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백성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우리 정치인들이 경계 삼아 나랏일 하는 데 힘을 모아주길 소망한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214010734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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