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하면 폐단” 보복정치 경계…‘계승 리더십’으로 위대한 업적
“모든 일을 통쾌하게 하면 폐단이 생긴다. 여러 신하는 모름지기 이를 명심하여 통쾌함(快)이라는 한 글자를 마음에 두지 말라.”
1755년 봄 62세의 국왕 영조(英祖)가 던진 이 말은 자책에 가까웠다. 즉위 초의 정적 제거 과정에서 부닥쳤던 대규모 반란을 교훈삼아 반대 당파를 최대한 포용했던 그였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이미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한다는 보고에 영조는 대로(大怒)했다.
국왕의 대로는 금세 노론 집권자들에게 전이돼 이용되었다. 집권자들은 국가의 권력 기구를 총동원해 비방 대자보를 쓴 세력 및 그 가족들을 체포, 처형했다.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까지 줄줄이 끌려와 고문당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이 따르던 붕당을 비판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정치적 마녀사냥으로 격화돼 가는 정국에 제동을 건 것은 국왕 영조였다. 자식을 고문해 그 아버지의 역모 혐의를 캐묻자는 신하들의 요청을 들은 그는 ‘아차’ 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지양해왔던 보복정치의 덫에 다시 걸렸음을 인지하고 ‘역모정국’의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
영조가 보복정치를 중단하라고 선언한 것은 정책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5년 전인 1750년부터 추진해온 개혁정책, 즉 양반에게도 군역이라는 세금을 매겨 균등과세를 실현하려는 균역법과 도성 재개발사업인 청계천 준천(濬川)이 그것인데, 둘 다 소론의 박문수가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보복정치라는 정치적 회오리바람이 갖는 파괴력이다. 이 바람은 엄청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단 불기 시작하면 끝 간 데를 모른다. 태종이 세종의 장인까지도 모조리 제거한 것은 그 회오리바람의 속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계자인 세종이 ‘손에 피 묻히는 일’의 악순환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지 않으면 애당초 성과를 거두는 정치(成效之政)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정치의 본론’, 즉 성과 거두는 정치를 향해 성큼 걸어갈 수 있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찬승비서(纘承丕緖)’, 즉 태조와 태종이 쌓아놓은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갈고 닦아온 정치적 업적을 계승할 때 신뢰를 얻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국정을 펼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세종은 자신을 계승 군주로 자리매김하곤 했다. 가령 재위 중반부에 신하들이 북방영토개척을 반대하자 그는 부왕 태종을 거론했다. 두만강이라는 천혜의 국경선을 지키려던 부왕의 뜻을 계승한 것일 뿐 새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백성들의 의구심과 저항을 넘어서고, 곧바로 국가사업에 착수하게 하는데 ‘이어서 한다(紹述)’는 말보다 효과적인 게 없다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실록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영조가 만약 ‘통쾌한 정치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최대 업적으로 불리는 균역법과 청계천 준천은 가능했을까? 태종이 ‘손에 피 묻히는 일’로부터 후계자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세종치세는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교훈은 크고도 무겁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124010326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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