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 ‘집현전’ 설치… 최고로 대우해주되 최대한 활용
세종에게는 있고, 태종과 세조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 역량으로 볼 때 태종과 세조가 절대 세종보다 못하지 않았다. 태종의 경우 고려 말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실력자요, 조선 건국을 기획하고 성사시킨 실행가였다. 세조 역시 할아버지 태종처럼 국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으나 ‘책운제권(策運制權)’ 즉 스스로 운수를 기획하여 권세를 제어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둘 다 학문과 무예, 예능에 뛰어난 리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세조 시대의 업적을 다 합쳐도 세종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싱크탱크 집현전이다. 세종은 왕자 시절에 “학문에 뛰어났으나 군무(軍務)에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무예(文武藝)에 고루 뛰어난 부왕 태종이나 아들 세조보다 개인 역량에서는 못 미쳤다는 얘기다.
그 때문인지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싱크탱크를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즉위한 지 1년 7개월 만인 1419년 12월 12일(양력 1월 10일)에 그는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다시 아뢰지 않는가”라면서 설립을 독려했다.
집현전은 세종이 처음 만든 게 아니다. 당나라 때 이미 같은 이름의 관청이 있었고,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에도 도입됐다. 고려의 제도를 상당 부분 그대로 계승한 조선에서도 집현전은 계승됐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는” 제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집현전의 사례에서 보듯이, 제도의 설립이 그 기능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싱크탱크를 자처하고 있는 수많은 국책연구기관 중 당초 설립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는 곳이 몇이나 될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국가에 있다. 청와대나 정부는 기관장 낙점이나 예산 관리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국책연구기관의 인재 양성이나 결과 활용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이와 반대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우대하되, 최대한 활용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우선 출퇴근 시간에 구애되지 않았다. 근무처가 경복궁 안에 있어서 지방으로 발령이 날 염려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수시로 국왕을 만나 정책을 제안하고 의견을 나눌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집현전이 주관하는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어전회의가 그것이다.
“집현전은 오로지 경연을 위해 설치했다”는 세종의 말처럼 집현전 학사들은 국왕이 주재하는 회의를 창의적이고 성과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심했다. 회의 초반에 책을 함께 읽어서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말과 생각을 모으는 한편, 당면 사안 논의 때는 정확한 지식으로 올바른 결정을 돕는 것도 집현전의 역할이었다. 부정확한 지식이나 잘못된 정보로 국책 사업이 흔들리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게 집현전 같은 우수한 싱크탱크가 아닐까?
집현전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과 신하들의 우수 두뇌에 대한 존중과 혁신적인 인재 양성 시스템이 있었다. 세종은 집무실 가까이에 집현전을 두고, 수시로 찾아가 해당 정책에 대한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물어보았고, “증빙과 원용(援用)을 거친” 학사들의 의견을 바로바로 수용했다.
“종신(終身)토록” 맡은 분야에만 전념하도록 하되, 필요할 경우 산사(山寺)에서 합숙하며 이질적인 인재들끼리 토론하게 하는 ‘상사(上寺)독서제’라는 융합연구 안식년 제도 역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오늘날 우리는 축적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일을 맡은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최초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처럼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다가 준비 없이 서둘러 착수하곤 한다. 제대로 ‘백서’ 한 권 내놓지 않고 자신의 시행착오를 팽개치는 경우도 많다. 과거 사례에 대한 철저한 검토, 발생할 문제점에 대한 다방면의 대비,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정책 방향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칠 수 있는 ‘대한민국 집현전’을 만드는 일을 세종 즉위 600돌인 올해 착수했으면 한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110010326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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