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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功 세웠다고 무조건 벼슬 줄 수 없다”… 백성·관료 신뢰 확인 후 임명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04-08 09:14:03 조회 : 322

“戰功 세웠다고 무조건 벼슬 줄 수 없다”… 백성·관료 신뢰 확인 후 임명

 

■ 우의정 제수받은 名將 최윤덕 

세종시대 사람 중에서 유명하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을 들라면 최윤덕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마저 여의고, 그릇 만드는 천인 밑에서 자랐다. ‘연려실기술’을 보면 어려서부터 힘이 셌고, 활쏘기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산속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다가 덤벼드는 호랑이를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였다는 전설로도 유명하다.  

최윤덕이 그저 힘센 장군이 아니라, 역사적인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는 세종과의 만남이다. ‘파저강토벌’, 즉 세종 재위 15년째인 1433년 압록강 건너 파저강 인근 여진족을 대파한 일이 그 예다. 이때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16세기 후반에 편찬된 책 ‘국조정토록’에 나온다. 그의 군사들이 적진에 들어가 야영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큰 노루 네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군사들이 당황해 술렁였다. 느닷없는 산짐승의 출현을 놓고 다들 이게 무슨 징조냐며 수군거렸다.  

그때 최윤덕이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무왕께서 주왕을 정벌하려고 하수를 건널 때, 흰 물고기가 왕이 탄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뱃사람이 ‘흰색은 주왕이 다스리는 상(商)나라의 색인데, 왕의 배에 들어왔으니 곧 상나라 사람들이 그대(무왕)에게 귀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야인들을 정벌하러 가는 길이다. 노루란 들에 사는 야수(野獸)인 바, 그들이 제 발로 걸어와서 사로잡히니, 이는 필시 야인이 섬멸될 징조로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윤덕은 고전(서경) 속 이야기를 들어 예기치 않은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이어지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파저강 토벌의 공로는 대마도정벌의 열 배가 된다.” 세종이 이처럼 크게 기뻐할 만도 했다. 단 9일간의 전투로 430여 명의 여진족을 참살 또는 생포해 적을 제압한 것도 놀라웠지만,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국경선을 끌어 올리겠다는, 태종시대 이래의 숙원 해결의 길이 이 토벌을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승 소식을 들은 세종은 고민에 빠졌다. 개선장군 최윤덕의 공로를 어떻게 포상해야 하는지를 놓고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라는 정1품의 무임소 장관 자리를 맡기자는 제안도 있었고, 좌의정에 임명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정승의 자리는 그 임무가 막중하므로 전공(戰功)을 세웠다고 그 벼슬을 줄 수는 없다. 과연 최윤덕의 덕망이 우의정에 적합한지 의논해서 아뢰라”라는 게 세종의 대답이었다.  

숙의 끝에 신하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최윤덕의 덕망은 공평하고 청렴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조심하여 봉공(奉公)하는 사람이니, 비록 수상, 즉 영의정을 삼을지라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단 전투만 잘한 공로자가 아니라, 백성과 관료들의 신뢰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뛰어난 리더라는 얘기였다. 

새해 벽두에 최윤덕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단 이즈음(음력 12월 5일)이 그의 기일이어서가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각종 정부 기관 사람들이 낙하산 인사들로 뒤숭숭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공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세종의 인사원칙이 새삼 돋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긍정 마인드로 앞으로 나아갔던 최윤덕의 말과 행동이 우리에게도 용기를 북돋우는 이야기로 널리 회자되기를 바란다.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1030103263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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