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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지효포럼] 권선필 박사_세종에게서 배우는 공론정치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8-01-12 20:01:21 조회 : 666

 

 

세종에게서 배우는 공론정치 

 

포스트모던 공론사상과 다른 점

 

 

권선필 

 

목원대 행정학과 교수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신고리 5, 6호기 '건설재개'라는 내용을 골자로 대정부 권고가 결정된 이후 갈등 이슈에 참여적 문제해결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는 데 대하여 숙의민주주의적 공론조사가 한가지 대안이 될 수 있음에 대하여 많은 정치행정학자들이 동의를 해왔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민주주의는 사적 개인들이 공중으로 결집하여 저마다의 사견을 공적으로 토론에 부쳐 협의하는 마당으로서 '공론장'(?ffentlichkeit)이 형성되지 못했다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하버마스(Habermas)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나타난 공법개혁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전통에서도 참여적 정책결정을 위한 공론장의 형성과 운영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의 공론정치를 통해 서구적 숙의민주주의나 공론장 이론과는 다른 공론이론과 참여적 정책결정을 발견할 수 있다.

 

 

공법(貢法)이란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방법을 정한 법을 말한다. 토지의 소유가 개인이든 국가든 상관없이 토지의 소출에 대해 조사를 한 후 그에 근거하여 세액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손실담험법(損失踏驗法)이 태종때 제정되었다. 손실담험법에 따라 지방의 하급관리들이 매년 추수기가 되면 현장에 나가 수확에 대한 답험을 하고 그 결과를 기준으로 세액이 정해지므로 지방하급관리의 농간으로 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 국가재정도 빈약해지는 폐단을 개혁하려는 것이 공법제정의 목적이었다. 세종은 손실답험법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과 아전의 농간을 해결하고 국고수입의 허약화를 막기 위해 공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공법을 통해 평년의 수확량에 근거하여 일정량의 세액을 납부하도록 하는 조세징수의 효율화와 재정건전성 강화를 하려는 것이었다.

 

공법 제정을 통한 조세제도 개혁을 위해 세종이 17년간 추진한 주요한 활동들은 한마디로 공론형성과 참여적 의사결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세종의 공법개혁은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법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과거시험에 공법개혁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여 공법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공법개혁에 대한 논의는 세종 9년 (1427년)에서 시작되어 전분연분법으로 결정되어 시행되는 세종26년 (1444년)까지 장장 17년간 진행된다. 이 과정에는 단순히 신하들 간의 토론만이 아니라 세계 최초라 불릴만한 대규모 여론조사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시행과 수정을 모두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참여적 의사결정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조정에서 공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문과 과거시험에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하겠는가.”(세종실록 9년(1427) 3월 16일. (원문) 用貢法而去. 所謂不善, 其道何由)의 문제를 출제하여 선진 유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다음 해인 세종 10년 좌의정 황희와 토론하여 공법개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하고 손실담험법의 개정방향을 토지의 산출과 연도별 작황을 함께 감안하여 징수하는 전분연분법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후 계속적으로 신하들에게 손실담험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한다 (세종실록 11년 11월 16일, 12년 7월 5일).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세종12년에 실시된 대규모 여론조사이다. 세종 12년 3월 5일 고위관료에서 현장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공법과 관련된 주요한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국적 여론조사를 호조에게 지시하였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命自政府六曹各司及京中前銜各品, 各道監司守令品官, 以至閭閻小民, 悉訪可否以聞)“ 호조는 그 해 8월 10일 공법의 가부에 대한 의논을 갖추어서 아뢰었는데 그 기간이 무려 5개월이 걸렸다. 호조에서 올린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찬성이 98,657명, 반대가 74,149명으로 총 172,806명에 대한 여론을 조사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조선의 인구가 692,477명인 것을 고려한다면 인구의 4분의 1에 대해 조사한 것이다. 조사결과 찬성 57.1%로 반대 42.9%보다 많았지만 세종은 공법을 바로 시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황희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반대하는 대신들은 무려 90.2%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공법의 시행은 5년 이상을 미루게 되고 세종 18년(1436년)에 들어 젊은 학자인 정인지의 건의로 시행에 대한 논의를 재개한다. 이번 단계에서는 여론조사가 아니라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공법추진에 따른 세부적인 실행방안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공법상정소는 실행을 위해 세부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의정부와 호조를 포함한 공법관련 관원으로 구성된 일종의 태스크포스형태의 조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침내 세종 19년 (1437년) 7월에 상정공법(詳定貢法)이 의정부와 호조의 심의를 거쳐 상정된다. 그러나 상정공법의 시행은 마침 그해에 닥친 흉년으로 인해 시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상치 못한 환경변화를 반영하지 않는 시행은 더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세종은 상정공법의 시행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강우량이 좋아져 상황이 호전된 다음 해 세종은 다시 공법 시행을 요청하였고, 이를 위해 뒷받침하기 전라 경상 양도에 여론조사를 할 것을 제안하였다. 신하들은 반대에 의해 여론조사는 무산되었으나, 토론을 통해 경상 전라 양도에 먼저 공법을 시행하는 부분적 점진적 시행을 끌어내었다 (세종 20년 7월 11일). 마침내 세종 26년에 전분6등 연분9등법으로 최종 확정 실시하게 된다.

 

 

세종의 공론정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크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세종의 공론정치가 근거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으로 신유학(성리학)과, 둘째는 공론정치의 기본요소들이라고 생각된다.

 

세종의 공론정치(조선시대를 포함하여)는 성리학적 공론관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으로는 1)보편적 인간관, 2)음양생성의 원리인 천리 개념, 3)소통의 원천으로 마음, 3)토론을 통한 소통, 4)차이의 인정, 5)다양한 참여자의 통합으로 예禮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자유주의나 하버마스 같은 포스트모던 공론철학과는 차별적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의 공법개혁은 국가개혁정책 추진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세종의 공법개혁을 실록을 통해 살펴보면 문제제기-> 공론화 -> 여론조사 -> 추진중단 -> 추진재개-> 추진조직(전재상정소) 구성 -> 환경변화와 수정 -> 지역별 시행 -> 시행후 보완 -> 최종안 확정과 같이 진행된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개혁정책추진의 핵심요소들은 1)이해관계자, 2)추진조직, 3)공론화와 추진 과정, 4) 시행과 수정이라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네가지 패턴의 관점에서 공론화 정책 추진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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